2021·8
⟪장크트갈렌의 목소리⟫는 스위스 디자이너 요스트 호훌리의 북디자인을 선보이는 전시이다。 장크트갈렌은 스위스 동부에 위치한 도시로 요스트 호훌리는 이곳에서 태어나 학교에 다녔고 지금까지도 자신의 고향인 이곳에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전시 제목에서 디자이너 개인이나 특정 북디자인 작업이 아닌 다소 낯선 「지역」의 이름을 앞서 내세우는 이유는 요스트 호훌리 북디자인의 시작점이 장크트갈렌이라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전시장에 놓인 67권의 책은 타이포그래피、 예술、 지역문화 등 주제에 따라 여섯 개의 섹션으로 나뉜다。 이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튀포트론(Typotron)』과 『에디치온 오스트슈바이츠(Edition Ostschweiz)』이다。 장크트갈렌에 위치한 인쇄소의 제안으로 시작한 두 시리즈는 각각 1983년부터 1998년까지、 2000년부터 2016년까지 이어졌고 17권씩 발행되었다。 요스트 호훌리는 이 시리즈의 기획과 북디자인을 맡았다。
본격적으로 책을 감상하기에 앞서、 이 전시의 특별한 점 중 하나는 관람객이 모든 책을 손끝으로 직접 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종이책이 전시장에 놓일 때、 종이라는 매체의 특성 때문에 책은 유리관 안에 안전하게 담기거나 관람객은 손에 장갑을 껴야한다。 이 전시는 이러한 제약을 과감히 내던진다。 덕분에 관람객은 책 커버에 쓰인 나무 질감의 종이、 방수처리용 종이를 직접 느낄 수 있고 면지와 내지、 제본 방식 등 책 구석구석을 들춰보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또 한 가지 특별한 점은 책의 내용과 제작 사양에 대한 풍부하고 섬세한 캡션이다。 전시 섹션 별로 마련된 QR코드를 스캔하면 해당 섹션과 그에 속하는 책에 대한 캡션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로빈 킨로스의 코멘트、 출판사 소개 글、 기획자의 글 세 가지 유형으로 이루어진 설명은 관람객이 뛰어난 외국어 실력이나 해박한 배경지식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책을 「보는데」 그치지 않고 「읽을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책에 쓰인 서체의 종류와 크기、 종이와 제본 방식 등을 빼곡하게 적은 제작 사양은 책을 한층 더 가까이 들여다보게 한다。
책에 대한 애정 그리고 노고가 느껴지는 캡션을 따라 책 한 권 한 권을 읽다보면、 아름다운 디자인만큼이나 주목하게 되는 지점이 요스트 호훌리의 기획력이다。 지역을 소재로 하는 기획물의 경우、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필요 이상으로 높이려 한다거나 지역 밖의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한 채 폐쇄적인 성향을 띄기 쉽다。 『튀포트론』과 『에디치온 오스트슈바이츠』 두 시리즈는 이러한 우려와는 거리를 두고 장크트갈렌의 사람、 자연、 문화를 균형감 있게 다루며 지역의 목소리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튀포트론』 시리즈에서는 장크트갈렌 사람들의 목소리 두드러지는 반면 『에디치온 오스트슈바이츠』에서는 자연과 지역 문화가 목소리를 높인다。 『튀포트론』 1호、 6호、 8호에서는 각각 요스트 호훌리의 스승인 루돌프 호스테틀러와 빌리 바우스、 제본가 프란츠 차이어에 대해 이야기한다。 디자이너나 예술가 외에도 골동품 수집가가 모은 새장이나、 과일 가게 상인의 일상을 소재로 삼으며 『튀포트론』은 지역이 가진 다양한 층위의 목소리를 고루 들려준다。 『에디치온 오스트슈바이츠』에서는 조약돌(1호)、 단풍잎(4호)、 깃털(8호)과 같이 하나의 자연 요소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호들이 눈에 띈다。 이 밖에도 면직물 생산 공장(3호)、 출판협동조합(5호)、 지역에 대한 회고담(11호)을 통해 지역의 특수한 역사나 문화를 다룬다。
두 시리즈에는 요스트 호훌리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글이나 이미지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참여했다。 많은 부분 그가 직접 글을 쓰기는 했지만 시리즈를 오랫동안 이어가기 위해서 다른 분야 전문가와의 협업은 필수적이었으라 짐작한다。 『튀포트론』 2호에서는 고생물학자 미하엘 구겐하이머와 『에디치온 오스트슈바이츠』 4호와 7호에서는 각각 식물학자와 동물학자와 협업을 통해 내용에 대한 전문성을 갖췄다。 사진가와의 협업도 눈에 띄는 부분 중 하나다。 베른하르트 비쇼프、 미하엘 라스트、 요나스 쿤、 한스 외틀리 등의 사진가가 매호의 컨셉에 맞게 촬영한 사진은 가지런하게 정렬된 글과 조응하거나 그 사이를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등 요스트 호훌리의 디자인을 통해 책 시리즈에 생동감을 더한다。
한 지역을 소재로 40년 가까이 거의 매해 한 권씩 책을 발행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리고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 지역、 사람、 디자인을 차례로 나열한 전시 제목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답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장크트갈렌은 오래된 수도원으로 유명한 지역으로、 필사본을 비롯한 방대한 규모의 기록 유산을 가진 도서관이 있고 산업화 시기에는 면직물과 자수 공업으로 이름을 알렸다。 요스트 호훌리는 바로 이곳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고 장크트갈렌 미술공예학교를 졸업한 뒤 파리에서 수학하고 돌아와 현재까지 장크트갈렌에서 생활하고 있다。 시간이 쌓아올린 역사와 그것을 간직하고 있는 지역、 그리고 그곳에서 나고 자라 머무는 사람。 그의 북디자인은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대구를 기반으로 하는 출판사 「사월의눈」을 운영하는 전가경과 정재완이 각각 전시의 기획과 디자인에 참여한 점은 전시에 무게감을 더한다。
혹시 한국에도 지역을 기반으로 이어져 오는 아름다운 출판물이 있을까? 만약 없다면 만들 수 있을까? 만들 수 있다면 어떤 형태일까? 빠르게 바뀌는 유행과 유행을 좇는 사람들、 쉽게 떠오르고 사라지는 일과 물건들。 오늘날의 주위를 둘러보며、 한 가지 일을 묵묵히 이어간다는 것(또는 한 가지 사물이 이어져 내려온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다시금 생각해본다。